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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합덕면 마을 주민간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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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ontributor.author박찬승-
dc.date.accessioned2022-12-21T07:26:26Z-
dc.date.available2022-12-21T07:26:26Z-
dc.date.created2022-09-19-
dc.date.issued2007-06-
dc.identifier.issn1226-5535-
dc.identifier.urihttps://scholarworks.bwise.kr/hanyang/handle/2021.sw.hanyang/179922-
dc.description.abstract충남 당진군 합덕면은 구룽지대, 중간지대, 그리고 평야지대의 3개 지대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재지지주들은 주로 구룽지대와 중간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재지지주들은 신리의 박씨가를 빼놓고는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으며, 대부분 소지주 내지 부농 정도로 볼 수 있는 이들이었다. 합덕의 넓은 평야의 주인은 대부분 부재지주들이었으며, 농민들은 대부분 소작농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합덕면을 장악한 가운데, 인민군은 내무서, 인민 위원회, 당 조직, 각종 외곽 단체 등을 설치하고 이전의 토착 좌익활동가들을 기용하고, 이른바 ``기본계급``인 농민들을 ``자위대``로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인민군 점령당국은 특히 농민들의 자발성을 고취하기 위해 토지개혁을 시작하였다. 토지개혁은 빈농과 머슴(고농)에 의해 주도되도록 했고, 머슴들에게도 땅을 나누어 주었다. 점령 당국은 토지개혁을 통해 그들의 자발성을 고취하면서. 우익 인사와 자주계급의 숙청등에 그들을 이용하였다. 각 마을에서 대한청년단 등 우익 단체에서 활동한 이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또 신흥리라는 마을에서는 약간의 토지를 소유했던 소지주 가족들이 같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대부분 소작인들로 구성되어 있던 신석리와 옥금리의 농민들은 9월 29일 대지주 박씨가가 있는 신리를 습격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박씨가와 신리 주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습격에 실패하였다. 하지만 천주교회가 장악하고 있던 합덕리나, 박병렬가가 장악하고 있던 신리의 소작 농민들은 좌익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들 마을은 겉으로는 점령당국에 협조하는 척 하면서 내면적으로 여전히 우익 마을로 남았던 것이다. 좌익세력들은 후퇴하면서 A리 마을 농민들을 동원하여 합덕리의 천주교인들 가운데 10여명을 끌고 오도록 하여 그들을 처형하였다. 9월 30일 이후 정세는 바뀌어 이번에는 합덕리 주민들이 A리 X마을 주민들을 모두 붙잡아다 곤욕을 치르게 하였고, X마을에서 부역자로 간주된 수십 명의 농민들이 처형되었다. 결국 전쟁기 남고 북의 좌우의 세력들은 자신들에 충성할 수 있는 세력을 만들기 위해 두 마을 사이의 해묵은 갈등, 그리고 이념과 종교의 차이를 이용하였던 것이고, 두 마을 사람들은 그 틈바구니에 끼어 회생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운산리의 한 마을에서는 역시 오씨와 남씨, 두 성씨 집안 간의 오랜갈등이 폭발하였다. 남씨가 사람들(남정산과 그의 부친)은 일제말기 마름과 구장을 지내 동민들로부터 원성을 샀고, 한때 마을에서 사실상 축출되었다. 그러나 남정산은 미군 진주를 등에 업고 마을에 복귀하였고, 남정산은 합덕의 우익 청년단 단장을 맡기도 했다. 때문에 남씨가와 대립관계에 있던 오씨가는 곤경에 처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남정산은 피신하였고, 오씨가의 오ㅇ영이 내무서 분소장을 맡았다. 남정산은 결국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남씨 집안의 여러 사람들이 오씨들에 의해 동원된 마을의 머슴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리고 9월 29일 이후에는 역으로 오씨 집안의 여러 사람들과 머슴들이 붙잡혀가 처형되었다. 이 마을의 경우에는 집안간의 갈등과 계급 갈등이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기 합덕면 지역 주민들 간의 대립은 이처럼 여러 가지 중첩된 배경 위에서 진행되었다고 생각된다. 즉 지주ㆍ마름 대 소작인 머슴 간의 갈등, 마을 간의 농수와 소작지를 둘러싼 갈등, 가톨릭교도와 사회주의자 간의 갈등, 경쟁 집안 간의 오랜 갈등 등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었다. 합덕면 지역의 여러 갈등관계는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심각하였다. 따라서 합덕의 각 마을 주민들은 좌우익, 남북한 정권에 그만큼 쉽게 이용당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다. 한국전쟁기 합덕면 지역에서 타 지역보다 커다란 희생을 치른 것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다고 여겨진다.-
dc.language한국어-
dc.language.isoko-
dc.publisher한국사회사학회-
dc.title한국전쟁기 합덕면 마을 주민간의 갈등-
dc.title.alternativeA Conflict among the villages in Hapduk Myun, Dangjin County during the Korean War-
dc.typeArticle-
dc.contributor.affiliatedAuthor박찬승-
dc.identifier.bibliographicCitation사회와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no.74, pp.141 - 176-
dc.relation.isPartOf사회와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dc.citation.title사회와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dc.citation.number74-
dc.citation.startPage141-
dc.citation.endPage176-
dc.type.rimsART-
dc.identifier.kciidART001067993-
dc.description.journalClass2-
dc.description.isOpenAccessN-
dc.description.journalRegisteredClasskci-
dc.subject.keywordAuthorKorean War-
dc.subject.keywordAuthorHapduk-
dc.subject.keywordAuthorDangjin-
dc.subject.keywordAuthormassacre-
dc.subject.keywordAuthorRoman Catholicism-
dc.subject.keywordAuthorlandlord-
dc.subject.keywordAuthortenant-
dc.subject.keywordAuthor한국전쟁-
dc.subject.keywordAuthor학살-
dc.subject.keywordAuthor좌우대립-
dc.subject.keywordAuthor합덕면-
dc.subject.keywordAuthor합덕리-
dc.subject.keywordAuthor지주-
dc.subject.keywordAuthor소작인-
dc.subject.keywordAuthor합덕 천주교회-
dc.identifier.urlhttps://access.hanyang.ac.kr/link.n2s?url=http://kiss.kstudy.com/search/detail_page.asp?key=346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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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Chan Se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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