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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막부 말기 일본인의 중국 견문과 대외 인식 : 1862년 센자이마루(千歳丸) 사절단의 상하이 체험을 중심으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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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Title: 막부 말기 일본인의 중국 견문과 대외 인식 : 1862년 센자이마루(千歳丸) 사절단의 상하이 체험을 중심으로
Authors: 방광석
Abstract: 본고에서는 에도막부(江戶幕府) 말기 일본이 ‘개국’한 직후 상하이에 파견한 사절단의 중국 견문을 살펴보고 사절단에 참가한 일본인의 대외 인식을 검토하였다.
아편전쟁으로 시작된 서양 열강의 동아시아 침략은 서양의 국제법 질서와 자본주의 교역체제를 동아시아 국가들에 강요하는 것이었다. 산업혁명을 통해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구미 열강은 동아시아 국가에게 순차적으로 문호개방을 압박하였다. 이른바 ‘조공질서’, ‘해금체제’를 유지하며 장기간 평화적 교류가 이루어져 온 동아시아 지역은 침략과 전쟁이 이어지는 갈등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일본은 1854년 미일화친조약 체결 이후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는 한편, 국가적 위기의식을 강화하면서 서양 열강의 실체를 알기 위한 탐색을 시작하였다. 1860년대 일본은 많은 사절단 및 시찰단을 해외로 파견했는데 그 가운데 아편전쟁 이후 새롭게 변모한 동아시아 해역을 센자이마루(千歲丸)를 타고 항행한 1862년의 제1차 상하이 파견 사절단의 사례를 중점적으로 검토하였다. 사절단에 참가한 막부 관료와 각 번 무사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당시 서양 세력이 진출해 있는 중국의 실태를 확인함과 아울러 근대전환기 일본인의 중국 인식 및 동아시아 국제정세 인식이 어떻게 변하였는지 밝히고자 하였다.
센자이마루 사절단은 ‘쇄국’ 일본을 벗어나‘ 만국공법’ 질서로 변화한 동아시아 ‘글로벌’ 해역을 거의 처음으로 목도한 일본인들이었다. 그들이 남긴 일기, 견문록에 따르면 조계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개항 도시 상하이의 번성함에 감탄하는 한편 서양인에게 무기력하게 굴종하는 중국인의 모습과 태평천국의 내란에 진압하지 못하고 영국·프랑스 등에게 상하이 방어를 맡기고 있는 청조의 무력함을 개탄하였다. 또한 화려한 조계지의 이면에서 오염수와 오물, 악취, 고물가 등에 고통받는 중국인의 비참한 생활 환경도 직시하였다. 사절단 참가자들은 이러한 중국이 처한 상황과 동아시아 정세를 직접 체험하고 일본도 개항이 진전되어 각지에 서양 열강의 조계지가 건설되면 비슷한 상황에 처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귀국 후 서양의 침략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을 모색해 나갔다.</description>
    <dc:date>2026-02-01T00:00:00Z</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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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납화(蠟畫)의 재발견 : 디드로와 켈뤼스 백작 사이의 논쟁을 중심으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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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Title: 납화(蠟畫)의 재발견 : 디드로와 켈뤼스 백작 사이의 논쟁을 중심으로
Authors: 김선형
Abstract: 18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신고전주의가 태동할 무렵, ‘납화(peinture à l’encaustique)’에 대한 18세기 인문학자들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었다. ‘납화’ 또는 ‘엔코스틱’이란, 안료를 벌꿀 또는 송진에 녹인 다음 불에 달군 인두로 목판의 그림에 색을 입혀서 표현하는 고대 예술의 기법인데, 제작 과정이 어렵고 까다로워서 고대 이후 거의 잊혀진 상태였다. 그런데 이 고대의 납화 기법이 18세기 프랑스에서 재발견된 것이다. 당시 인문학자들은 고대의 회화 작품에서 그 기법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하고는 납화를 재생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켈뤼스 백작이 고대 납화의 비밀을 자신이 발견했다고 주장했고, 그의 발견은 아카데미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뤄졌다. 반면 같은 시기 디드로는 그 납화 기법이 이미 화가 장 자크 바슐리에가 실험해 본 것이라며 백작의 주장에 강력히 반박했지만, 켈뤼스 백작은 이에 대한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
현대의 발명은 고대에 이미 발견 또는 발명된 것을 재발견하고, 모방한 후 그것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요구한다. 따라서 본 논문은 새로운 기술의 발명(또는 발견)을 어떠한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지에 대해 검토하고, 이를 개념화·체계화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을 탐구하는 데 그 목표가 있다.</description>
    <dc:date>2025-12-01T00:00:00Z</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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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주요섭의 『구름을 잡으려고』에 나타난 한인의 미주 이민 초창기 모습 연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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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Title: 주요섭의 『구름을 잡으려고』에 나타난 한인의 미주 이민 초창기 모습 연구
Authors: 김미영
Abstract: 이 글은 주요섭의 『구름을 잡으려고』에서 미국 이민 초창기 한인 삶의 리얼리티와 작가의 철학을 분석한 것이다. 주인공 준식은 부자가 되려고 미국행을 택했지만 멕시코에 내려져 목화 농장에서 노예노동에 시달리다 4년 만에 미국 본토로 간다. 그는 30여 년간 미국 서부에서 세 번이나 꿈의 실현에 근접했으나, 결국 실패한다. 개인적 불운과 미국의 경제공황, 유럽의 정세 변화 때문이었다. 이 작품의 리얼리티는 20세기 초, 호경기의 미국은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에게조차 경제적 성공이 가능한 시공간이었다는 점, 초창기 조선인 이민자의 성공 여부는 개인적 성실성 외에도 국제적 경기 변동이나 정세 변화와 깊이 관련된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 드러난 주요섭의 철학은, 1929년부터 미국이 대공황에 접어들고 유럽의 정세마저 악화되자, 약소 민족 출신 외국인 이주노동자는 환대받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 배제와 도태의 대상이 되었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다. 이로써 주요섭은사회진화론적 세계 인식의 비윤리성을 고발하고, 준비 없이 핑크빛 광고만 믿고 부를 좇아 무모하게 미주로 이주하려는 당시 조선인들에게 경종을 울렸다.</description>
    <dc:date>2025-12-01T00:00:00Z</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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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광주 지역어 브랜드 네이밍을 통한언어 자산화 사례 분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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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Title: 광주 지역어 브랜드 네이밍을 통한언어 자산화 사례 분석
Authors: 한승규
Abstract: 본 연구는 광주 지역어가 브랜드 네이밍을 통해 문화적 자산으로 기능하는 방식을 분석하였다. 이를 위해 광주 지역에서 지역어를 상호명 또는 제품명에 활용하는 사례를 분석하였고 지역어가 상업 공간에서 어떻게 재맥락화되는지를 고찰하였다. 분석 결과, 지역어 네이밍은 상호 표기뿐 아니라 지역 정체성, 감성적 친숙함, 스토리텔링을 매개하는 문화적 실천으로 나타났다. 특히 지역어는 브랜드와 소비자 간의 정서적 거리를 좁히고 지역만의 문화적 상징 자본을 형성하여 경제적 가치로 전환되는 언어 자산화의 과정을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지역어 네이밍은 지역어가 문화적 정체성과 감성적 가치를 매개하는 언어 자원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본 연구는 광주 지역어 사례를 중심으로 지역어 활용이 브랜드 네이밍의 효과를 확장하는 방식을 분석함으로써 지역어와 상업적, 문화적 영역의 접점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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