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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cholarWorks Community:</title>
    <link>https://scholarworks.bwise.kr/sch/handle/2021.sw.sch/1814</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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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7 Apr 2026 21:32:47 GMT</pubDate>
    <dc:date>2026-04-17T21:32:47Z</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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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송 김동삼과 국민대표회의</title>
      <link>https://scholarworks.bwise.kr/sch/handle/2021.sw.sch/25753</link>
      <description>Title: 일송 김동삼과 국민대표회의
Authors: 이덕일
Abstract: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혁명의 결과로 탄생했다. 그러나 여러 문제점이 드러나자 그 해결책을 찾자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그 결과 1923년 1 월 3일부터 6월 7일까지 상해에서 125명의 대표가 참석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국민대표회의는 두 노선이 충돌했다. 임시정부를 인정하면서 대대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개조론과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다시 조직해야 한다는 창조론이었다. 의장에는 개조파인 김동삼, 부의장에는 창조파 윤해가 선출되었다.
국민대표회의는 개조파가 수적으로 우세했다. 그러나 창조파는 회의진행 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개조 안건이 채택되는 것을 막았다. 5월 15일 김동삼을 파견한 만주의 서로군정서와 한족회에서 소환하자 김동삼은 의장직을 사임했다. 부의장 윤해가 의장이 되었다. 6월 7일 창조파만이 모여서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켰으나 이는 자신들 파벌만의 합의였다. 온 민족의 총의가 모여서 개최했던 국민대표회의는 성과 없이 종료되었다. 그러나 온 민족의 대표들이 모여서 민족의 미래를 논의했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이정표가 될만한 사건이었다.</description>
      <pubDate>Thu, 01 Jun 2023 00:00:00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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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2023-06-01T00:00:00Z</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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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총독부의 민족종교 탄압과 제주도 무극대도 사건</title>
      <link>https://scholarworks.bwise.kr/sch/handle/2021.sw.sch/21974</link>
      <description>Title: 조선총독부의 민족종교 탄압과 제주도 무극대도 사건
Authors: 이덕일
Abstract: 제주도 무극대도교 사건은 일본이 군국주의로 나아가던 1937년에 제주도에서발생한 거대 시국사건이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은인물은 모두 20명이었다. 이들에게 가장 많이 적용된 죄명은 ‘불경죄’와 ‘보안법’ 이었다. 불경죄는 일왕이 곧 폐위될 것이라고 예견했다는 것이고, 보안법은 일제가 곧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외에 ‘육군·해군형법위반’이 있는데 이는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패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일제의 패전과 한국의 독립을 희구했던 독립운동 사건이었는데, 일제는 교주강승태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지지를 차단하기 위해서 ‘사기’ ‘강간치상’ ‘의사(醫 師)규칙 위반’ 등의 사회적 패륜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일제는 식민지 한국의 종교를 두 종류로 나누었다. 일본의 국교인 ‘신도’, ‘불교’, ‘기독교’는 종교로 분류해서 총독부 학무국 종교과에서 관할했다. 인간해방, 민족해방, 조국독립을 희구하는 민족종교들은 ‘유사종교’로 분류해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 총독부 경무국에서 관할했다. 유사종교로 분류된 종교들은 모두 민족의 해방을 꿈꾸는 민족종교였다.
해방 후에도 일제가 만든 이런 종교 분류가 그대로 받아들여져서 무극대도 사건관련자들은 국가의 서훈에서 배제되었다. 교주 강승태는 6년의 형기를 다 채운 뒤에도 일제가 석방시켜 주지 않을 정도로 요주의 인물로 관장했는데, 그를사이비 교주로 몬 총독부의 시각이 해방 후에도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제주도 무극대도 사건이 1930년대 가장 치열했던 민족해방운동의 하나로 새롭게 자리를 찾아야 할 때이다.</description>
      <pubDate>Thu, 01 Dec 2022 00:00:00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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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date>2022-12-01T00:00:00Z</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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