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의 역사의식

Abstract

과거에 관한 중세적 인식들 가운데, ‘중세에는 역사의식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생각만큼 흔히 범해지는 오해도 없는 것 같다. 시간에 관한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인식을 고찰해 보고자 하는 글들은 흔히 사도 바울에 대한 검토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사도 바울에 있어서는 시간이 유한했으며, 메시아의 재림이야말로 시간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성 아우구스틴도 이 점을 강조하면서, 세계의 역사를 엿새에 걸쳐 진행되었된 신의 창조 과정에 각각 상응하는 여섯 시기로 구분하였다. 그의 역사 체제에 따르면, 인류는 당시 제 6기에 속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가 얼마나 오래 가고 또 언제 끝날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계산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한편 P. 오로시우스는 <이교도 반박을 위한 7권의 역사서> 집필을 통해서, ‘분열과 혼란으로 가득찬 역사’를 분석함으로써, 악이 그리스도교가 도래하기 이전에 이미 이교도 세계에 있었음을 입증해 보였다. 특히 R. 서던(R. Southern)은 중세기의 다양한 역사의식들을 세 유형으로 구분하여, ‘고전주의 유형, 초기 과학주의 유형, 그리고 예언주의 유형’으로 범주화하였다. 서던이 예언주의 역사의식이라고 구분했던 시간과 역사에 대한 중세적 진술들은 성 아우구스틴 류의 역사 인식에 대해 보다 노골적인 도전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12 세기의 요아힘 피오르는 이 세상의 역사를 새로운 3 시기로 구분했으며, 13 세기의 영시 ‘성자 어컨월드’는 서로 상충하는 ‘시간성(temporalities) 인식’의 다양한 예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예들은 무엇보다도 역사의 목표가 단지 시간의 종결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현세적 시간 속에서도(in time)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다는 주장을 포함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에 의해 시작된 이후 성 아우구스틴과 P. 오로시우스를 거치며 누적되었던 중세적 역사의식은, 무엇보다도 시간이란 짧고 또한 영원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왔다는 생각을 축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 확인된 시간과 역사에 대한 중세적 진술들은 다양한 접근방식과 구분체제들을 보여주고 있다. 중세 역사의식은 결코 하나가 아니었다. 이 점에서 포스트 모더니즘, 현상학, 인류학과 같은 지적 운동들, 및 전례 없는 규모로 발생하는 역사적 단절들 등에 의해 만들어 지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의 현대적 시간 인식은, 필자가 보기에는, 점점 더 중세적인 것을 닮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