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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식민사학자의 고려시대 동북면의 국경·영토 인식The Understanding on the Border and Territory of Northeast Goryeo by Colonial Historians during Japanese Occupation Period

Other Titles
The Understanding on the Border and Territory of Northeast Goryeo by Colonial Historians during Japanese Occupation Period
Authors
권영국
Issue Date
Sep-2014
Publisher
한국사학회
Keywords
국경; 영토; 만선사관; 동북면; 식민사학자; border; territory; Northeast region; colonial historians
Citation
사학연구, no.115, pp.49 - 96
Journal Title
사학연구
Number
115
Start Page
49
End Page
96
URI
http://scholarworks.bwise.kr/ssu/handle/2018.sw.ssu/10821
ISSN
1225-133X
Abstract
근대적 역사연구 방법에 의한 조선의 국경과 영토문제에 대한 연구는 일제시기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먼저 시작되었다. 근대 이전인 조선 초에 4군과 6진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여진과 영토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을 때 고려시대의 北境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조선후기 역사지리를 연구한 실학자들도 고려시대의 국경이나 영토 문제에 관심이 많아 특히 공험진이나 선춘령의 위치에 관해 『고려사』 지리지의 기록이 세가 및 열전의 기록과 서로 맞지 않는다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9성의 위치를 길주 이남에 비정하기도 하였다. 일제시기 일본인 연구자들이 조선의 국경과 영토문제를 연구한 배경은 조선의 병합 결과 직면한 만주와의 절박한 국경 문제와 조선의 국경 수비 문제 때문이었다. 또한 만선사관의 시각에서 볼 때 만주와 조선의 국경은 두 지역을 하나로 묶는 데에 장애물이 될 수 있었으므로 역사적으로 두 지역 사이의 국경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연구의 중요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고려시대 동북면의 영토와 국경에 대한 일제시기 일본인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통일신라시대에는 登州(安邊)가 여진족과의 북경이었으나 고려 건국 이후 동북면지역의 축성과 개척이 진행되어 和州(영흥)까지 영토가 확대되어 현종대 이후 정종7년까지는 화주가 여진과의 교섭창구가 되었다. 그 후 정종7년에 定州․宜州․元興鎭 등에 축성이 이루어지고 관문이 설치됨으로써 이후 동북면의 북경은 定州로 확대되었다. 예종대에 윤관의 여진 정벌과 9성 설치로 동북면 지역의 영역 변화가 나타났는데, 이와 관련하여 당시 설치된 9성의 범위, 특히 가장 북쪽에 설치된 공험진과 선춘령의 위치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들은 각종 문헌자료의 철저한 고증과 현지답사를 통한 지리고증에 입각하여 역사적 사실이나 지리적 위치 등을 밝히려 하였다. 특히 9성의 설치 범위에 대해서 津田左右吉은 길주 이남으로, 池內宏은 함흥평야 일대로 비정하였지만, 松井等은 두만강유역 남쪽으로 비정하여 연구자마다 서로 다른 견해를 제시하였다. 한편 최근에 우리측 연구자들에 의해서도 많은 연구 성과들이 발표되고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두만강 이북의 만주지역에 비정하고 있다. 원 간섭기에는 동북면지역에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어 원의 지배하에 들어감에 따라 이 시기 고려의 영토와 국경문제는 쌍성총관부의 관할 범위를 둘러싼 주제가 주로 연구 대상이 되었다. 쌍성총관부의 관할지역은 초기에는 定州이남 登州이북지역이었으나 충렬왕24년의 各還本城을 계기로 정주이남 화주이북지역으로 축소되었던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공민왕대에 쌍성총관부 수복 이후 동북면지역에서 영토와 국경문제는 새로이 확보한 영토의 북쪽 경계가 연구 주제가 되었는데 대체로 길주를 동북면의 북경으로 보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시대 동북면의 영토와 국경문제를 둘러싼 일제시기 일본인 연구자들의 연구와 오늘날 우리측 연구자들의 연구 사이에 큰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윤관의 설치한 9성의 위치와 최북단에 설치된 것으로 전해지는 공험진의 위치를 둘러싸고 다소의 견해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동안 일본인 연구자들은 식민사관의 관점에서 9성의 범위를 고의적으로 축소하려 하였다는 의심을 받아 왔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 이용 가능한 사료를 세밀하게 검토했을 뿐만 아니라, 함흥 일대의 고성지를 직접 답사해서 9성의 지리적 위치를 고증하려 하였다. 그리고 9성의 설치 범위에 대한 연구 결과도 津田左右吉은 길주이남, 池內宏은 함흥평야 일대, 松井等은 두만강유역 남쪽으로 각기 달리 비정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식민사관의 관점에서 그들이 의도적으로 고려의 영토를 축소하거나 왜곡하려 하였던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은 병합된 조선을 일본 영토의 일부로 인식하게 된 상황에서 굳이 조선의 영토를 축소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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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ge of Humanities > Department of History > 1. Journal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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