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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통신사행과 對日外交의 특징Characteristics of Diplomatic Journey to Japan and foreign diplomatic policy to Japan in early Joseon

Other Titles
Characteristics of Diplomatic Journey to Japan and foreign diplomatic policy to Japan in early Joseon
Authors
장순순
Issue Date
2017
Publisher
한일관계사학회
Keywords
Tongshinsa; Muromachi shogunate(室町幕府); Tsushima; False Diplomat(僞使); Diplomat of Kings of Japan; Shogunate Shogun(幕府將軍); 통신사; 室町幕府; 대마도; 僞使; 일본국왕사; 막부장군
Citation
한일관계사연구, no.56, pp.55 - 94
Journal Title
한일관계사연구
Number
56
Start Page
55
End Page
94
URI
https://scholarworks.bwise.kr/gachon/handle/2020.sw.gachon/7091
ISSN
1229-3687
Abstract
본 연구는 조선전기 통신사의 파견 및 중단과정을 살펴보고, 조선정부가 일본에 통신사파견으로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추적함으로써 조선전기 통신사 외교의 실체를 밝혀보고자 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건국 이래 대일외교의 최대현안이었던 왜구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되자 조선정부는 室町幕府를 교린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통신사행 실시의 정례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막부는 교린에 입각한 외교적 관계보다는 대장경 청구나 불사의 비용 조달 등 물적 요구에 집착할 뿐이었고, 종종 통신사행은 예상치 못한 해난조난과 일본 국내의 내란상황으로 중단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室町幕府의 대단히 소극적인 대응에도 불구하고, 조선정부는 ‘교린우호’, ‘舊好回復’을 앞세우며 지속적으로 통신사행의 실시를 논의하고 파견하는 등 대일외교에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먼저, 조선정부는 통신사 파견을 통하여 막부정권과 교린에 입각한 통신관계를 설정하고 일본의 국내사정을 직접 견문함으로써, 일본의 국내 세력에 관한 정보를 안정적이고 정확하게 확보할 수 있는 정례적인 통로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둘째, 통신사의 파견은 장군교체에 대한 치제와 축하, 구호회복이라는 정형화된 목적 외에 일본의 국정탐색이 주목적이었기에 조선정부는 통신사행 통해 얻은 정보로 대일외교체제의 정비를 도모하였다. 셋째, 통신사에게는 室町幕府 외에도 별도의 사명으로 九州 지역의 여러 세력과 우호의 임무가 주어졌다. 이것은 조선 초기 조선정부가 대일사행을 통해서 얻은 정보를 기초로 막부장군만으로는 왜구를 금지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외교교섭의 대상을 왜구를 통제할 수 있는 대마도주와 九州지방 세력까지 확대한 다원화 정책의 전통에 기인한 것이다. 넷째, 통신사행 중 얻은 일본 국내 정보를 토대로 『海東諸國記』와 같은 대일교섭 메뉴얼의 내용을 재확인하고 추가로 얻은 정보를 보완함으로써 외교행위의 참고자료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행 중 직면한 예상치 못한 해상조난과 내란상황이라는 일본의 국내사정은 조선전기 통신사가 중단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또 다른 중단요인으로는 통신사를 받아들였던 일본측의 公家를 중심으로 한 지도자 계층의 국제 감각의 희박성을 들 수 있다. 그 결과 통신사를 포함한 대일사행의 빈도가 태종・세종대와 달리 단종・예종・세조・성종대에는 적어졌고 그 대상도 대마도에 한정되게 되었다. 그리고 통신사 파견에 대한 대마도의 조직적인 방해와 ‘僞使의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적인 상황을 들 수 있다.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에 걸쳐 일본국왕사를 사칭한 위사의 파견을 주도하고 있던 대마도로서는 통신사의 파견으로 자신들의 행위가 막부에 알려지는 것이 전혀 반가울 리 없었기 때문에 통신사행 실시에 반대하고 비협조적인 자세를 취했으며, 그 결과가 통신사행 중단의 한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1443년에 있었던 卞孝文의 사행을 마지막으로 조선전기 통신사가 京都에 가서 막부장군과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조선정부가 일본에 관한 정보를 대마도에만 의존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한계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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