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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중국국민당 경성지부와 조선 광동 화교 커뮤니티의 역할The Establishment of the KMT Keijo branch and the role of the Cantonese community in Seoul during Colonial Korea

Other Titles
The Establishment of the KMT Keijo branch and the role of the Cantonese community in Seoul during Colonial Korea
Authors
강진아
Issue Date
Feb-2022
Publisher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Keywords
The Kuomintang; Keijo Branch; Colonial Korea; Northern Expedition; Chinese Overseas; Cantonese merchants; anti-Chinese riot; 중국국민당; 경성지부; 식민지 조선; 북벌; 화교; 광동 상인; 반중폭동
Citation
동아시아문화연구, no.88, pp.129 - 164
Indexed
KCI
Journal Title
동아시아문화연구
Number
88
Start Page
129
End Page
164
URI
https://scholarworks.bwise.kr/hanyang/handle/2021.sw.hanyang/139419
DOI
10.16959/jeachy..88.202202.129
ISSN
2383-6180
Abstract
이 글은 1927년 중국국민당 경성지부의 창설 과정을 추적하여, 그 과정에서 서울의 광동인 커뮤니티가 주도적 역할을 했음을 밝혔다. 북벌과 국공합작의 분열 과정 속에서 서울의 유력 광동인 상인들은 분공을 선택한 장개석에게 지지를 보냈다. 반면 조선화교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산동성 출신의 화교들은 북경정부 지지자가 많았고, 국민당 경성지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세계 각 지의 광동인 화교 사회와 달리 조선의 광동인 사회에서는 손문이 주도한 신해혁명 당시에는 국민당 활동에 큰 반향이 없었다. 이는 조선에 진출한 광동상인들이 청 정부와 양무파 관료와 긴밀히 결탁한 집단이었기 때문이었다. 광동 화상은 부유한 상인이 많았으며, 보수적 성향이 강했다. 이러한 성격은 서울 광동인 커뮤니티의 오랜 지도자였던 동순태호 주인 담걸생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와 일본이 조선 화교의 경제적 세력을 약화시키는 각종 제도적 규제를 강화하면서, 조선 화교사회 내에는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위기감과 ‘강력한 모국’에 대한 희망이 북벌 과정에서 담걸생과 서울의 광동인 커뮤니티가 중국국민당 경성지부 창설에 적극 호응하게 된 또 다른 배경이었다. 그러나 1927년과 1931년에 조선에서는 대규모의 반중폭동이 발생하였으며, 1937년의 중일전쟁 발발로 조선 내에서 중국국민당 활동은 갈수록 일본 정부의 감시와 압력을 받았다. 경성지부 창설을 주도했던 광동인들은 다수가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이후 중국국민당 조선지부의 활동은 친일 선전기구로 바뀌었고, 산동성 출신자인 북방에 의해 관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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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GE OF HUMANITIES (DEPARTMENT OF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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