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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동족마을 주민들의 좌우분화 - 금산군 부리면의 사례 -A leftist-rightist opposition in consanguineous villages during the Korean War - A case of Buri Myeon, Kumsan Kun -

Other Titles
A leftist-rightist opposition in consanguineous villages during the Korean War - A case of Buri Myeon, Kumsan Kun -
Authors
박찬승
Issue Date
May-2008
Publisher
역사문화학회
Keywords
금산군; 부리면; 길씨; 양씨; 한국전쟁; 동족마을; 면장; 빨치산; 11; 2사건; Korean War; Massacre; Kumsan Kun; Buri Myeon; Rightist; Leftist
Citation
지방사와 지방문화, v.11, no.1, pp.225 - 257
Indexed
KCI
Journal Title
지방사와 지방문화
Volume
11
Number
1
Start Page
225
End Page
257
URI
https://scholarworks.bwise.kr/hanyang/handle/2021.sw.hanyang/178607
ISSN
1229-9286
Abstract
금산군 부리면은 28개 마을 거의 대부분이 동족마을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성씨는 해평 길씨와 남원 양씨이다. 길씨들이 많이 사는 곳은 불이리와 현내리, 예미리, 양곡리 등이다. 양씨들이 많이 사는 곳은 평촌리, 양곡리이다. 양곡리에는 길씨와 양씨들이 섞여 살고 있다. 길씨들은 길재의 후손들로서 오랜 세월 동안 부리면에서 굴지의 양반 가문으로 꼽혀왔다. 양씨들은 양응해의 후손들로서 길씨에 버금가는 양반 가문으로 행세해왔다. 1931년부터 1960년까지 면장을 지낸 이들(8명)도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길씨와 양씨들이었다. 특히 길씨는 5명을 차지했으며, 길상목은 1930년대에 10년 동안 면장을 지냈다. 하지만 길씨들 가운데 길상목의 아들 길경섭·길귀섭 형제와 같은 집안 길재철 등은 1920년대 후반 이후 사회주의운동에 깊이 관계하여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이들은 해방 직후 건준과 인민위원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 길상목이 면장 재직 시 면서기로 근무한 이들은 길상목ㆍ길경섭의 정치노선을 따랐다. 반면 양씨들 가운에 일제하에 사회주의운동에 관계한 인물은 없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양씨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양병규와 양은규는 부리면의 대한청년단, 국민회 조직에서 단장과 위원장을 각각 맡았다. 즉 길씨들의 주요 인물은 좌익으로, 양씨들의 주요 인물은 우익으로 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길씨들이 다좌익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우익 혹은 경찰이 되었다. 길씨들 가운데에는 주로 길상목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좌익이 되었고, 그의 영향에서 멀었던 이들은 우익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국전쟁기에 양자간의 대립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길상목-길경섭 부자는 전주에서 상당히 중요한 직책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일제 시기 길상목이 면장을 지낼 때 그의 밑에서 면서기를 하던 길씨들은 부리면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양은규는 체포되어 전주까지 끌려갔으나 다행히 살아 돌아왔다. 그리고 인민군 점령기 동안 커다란 학살 사건은 없었다. 그것은 길씨들과 양씨들이 사돈 관계 등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른바‘11ㆍ2사건’은 이러한 상황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11월 1일 부리면의 우익들은 면민대회를 열어 면민의 단합을 과시하였다. 이 소식은 불과 4㎞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빨치산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고, 그날 밤 빨치산들의 부리면 습격이 있었다. 이 습격으로 부리면에서는 모두 78명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면민대회를 주도하였던 양씨들과 그의 가족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우익쪽의 길씨들도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11ㆍ2사건’당시의 마을 주민들의 학살은‘빨치산의 존재’라는 변수가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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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Chan Seung
서울 인문과학대학 (서울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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