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tailed Information

Cited 0 time in webofscience Cited 0 time in scopus
Metadata Downloads

조선 士人의 만남과 절교 -李楨과 曺植의 사례를 중심으로-open accessMeeting and breakup of Joseon scholars –Focused on the cases of Lee Jeong and Jo Shik-

Other Titles
Meeting and breakup of Joseon scholars –Focused on the cases of Lee Jeong and Jo Shik-
Authors
박동욱
Issue Date
Dec-2022
Publisher
한국고전문학회
Keywords
절교; 조식; 이정; 이황; 남명학파; 퇴계학파; 하종악 후처 淫行事件; breakup; Cho Shik; Lee Jeong; Lee Hwang; Nammyeong school; Toegye school; Ha Jong-ak' s second wife
Citation
고전문학연구, no.62, pp.61 - 87
Indexed
KCI
Journal Title
고전문학연구
Number
62
Start Page
61
End Page
87
URI
https://scholarworks.bwise.kr/hanyang/handle/2021.sw.hanyang/185551
DOI
10.17838/korcla.2022..62.002
ISSN
1225-1445
Abstract
절교는 두 사람 간의 반목과 결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대 진영과의 싸움으로 그 전선이 확대되기도 한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南冥 曺植과 龜巖 李楨의 절교다. 남명과 구암은 꽤 오랜 세월 道義로 사귐을 이어오다가 ‘하종악 후처 淫行事件’이 계기가 되어 절교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물론 이 사건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일한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남명과 구암의 절교는 사실 양자의 문제가 아닌 구암의 스승인 퇴계를 포함한 삼자의 문제로 볼 수도 있다. 퇴계의 의도 유무와 상관없이 남명과 구암의 반목에 그가 큰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 두 사람의 단순한 절교로 끝날 듯 보였던 이 사건은 남명과 퇴계의 문도들 간의 저격과 해명으로 이어졌고, 남명과 구암 두 집안 후손들이 서로의 입장을 밝히는 글을 쓰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남명학파와 퇴계학파가 틀어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어 북인과 남인으로 나누어졌으니, 한 개인의 절교가 지성사의 분기로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퇴계는 1570년, 구암은 1571년 남명은 1572년에 각각 세상을 떠나면서 이 세 사람의 이야기도 끝이 났다. 절교 문제에 있어서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만약 두 사람이 절교하지 않았다면, 구암이 남명과 퇴계학파의 훌륭한 가교 역할을 했었다면, 정인홍이 몰락하지 않고 남명학파가 퇴계학파와 대등하게 성장했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해 봤을 때 아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모든 일이 상상한 것처럼 풀렸다면 주자학 일색인 조선의 학문이 좀 더 다채로운 스펙트럼으로 확장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Files in This Item
Appears in
Collections
서울 인문과학대학 > 서울 인문과학대학 > 1. Journal Articles

qrcode

Items in ScholarWorks are protected by copyright, with all rights reserved, unless otherwise indicated.

Related Researcher

Researcher Park, Dong uk photo

Park, Dong uk
COLLEGE OF HUMANITIES (COLLEGE OF HUMANITIES)
Read more

Altmetrics

Total Views & Downloads

BROW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