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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병의 무기와 기병전술Armed of cavalry and cavalry Tactics in Korea

Other Titles
Armed of cavalry and cavalry Tactics in Korea
Authors
이홍두
Issue Date
2014
Publisher
역사실학회
Keywords
cavalry battles; Chinese chariots; Koguryo’s heavy cavalry; cross‐bow; mobility The phalanx; armored cavalry; fire artillery and crashing machines; clearing the field with no food left; the command of ‘Sanseonghaedoipbo; Sanseong Banghobyeolgam; Kim Yoon hoo; firing guns called Hojun po; Qing' s invasion in 1627; Qing' s invasion 1636; 기마전; 중국 전차; 고구려 중장기병; 쇠뇌; 기동력; 방진; 철기병; 충차; 청야수성전; 산성해도입보책; 산성방호별감; 김윤후; 호준포; 정묘호란; 병자호란
Citation
역사와 실학, no.53, pp.87 - 114
Journal Title
역사와 실학
Number
53
Start Page
87
End Page
114
URI
https://scholarworks.bwise.kr/hongik/handle/2020.sw.hongik/18608
ISSN
1976-1023
Abstract
이 글에서 논의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고구려 기병이 후한과 조위의 전차 및 당나라의 기병대를 상대로 어떻게 기마전을 전개하는가의 문제를 기병의 무기와 기병전술의 측면에서 살폈다. 고구려 기마전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후한이 편창차 혹은 녹각차라고 부르는 여러 개의 전차를 전방에 배치하여 원형의 방진을 치고, 고구려 기병의 접근을 막는 경우, 전연과 후연의 북방 유목민족을 상대하면서 중장기병을 창설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한편 주력군을 전차에서 기병으로 교체한 당나라가 평지 기마전에서 우세했는데, 그것은 당나라가 기병으로만 구성한 跳盪隊, 보병과 기병을 절반씩 편성한 戰鋒隊, 보병과 전차부대를 혼성한 駐隊를 편성하여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고려는 북방의 유목민족인 요, 금, 원의 세 왕조를 상대로 전쟁하였다. 그런데 이들의 주력군은 기병이었으므로 평지 기마전을 수행했다. 반면에 고려는 요새형 산성을 쌓고 공성전을 전개했다. 거란전쟁 때 고려는 청천강 이북에서는 공성전을, 이남에서는 평지 기마전으로 교전했는데, 그것의 차이는 성의 유무였다. 한편 여진전쟁에서는 윤관이 9성을 설치한 이전과 이후가 달랐다. 9성 설치 이전에는 평지 기마전이 지배적이었다면, 설치 이후에는 공성전을 위주로 대응하였다. 한편, 몽골전쟁 때는 왕실이 강도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본토에서는 소규모 부대가 공성전으로 방어에 치중하였다. 고려는 북방 유목민족의 기동력을 약화시키려고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했는데, 거란전쟁 때는 선봉에 검차를 배치하고, 여진전쟁 때는 기병으로만 편제한 신기군을 창설하였으며, 몽골전쟁에서는 화포를 사용하였다. 조선시대는 야인정벌과 임진왜란 및 정묘, 병자호란과 관련하여 기마전을 전개했다. 태종의 야인정벌은 동왕 10년(1410) 2월 동북면 모련위 정벌에서 기병 1,150명을 선발하여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세종은 동왕 15년(1433) 4월 서북면 1차 야인정벌을 단행했는데, 원정군 사령관 최윤덕이 보․기병 1만 5천을 7개 부대로 편성하여 건주위 이만주가 거느린 4천의 기병을 격퇴하였다. 세종 19년(1437) 9월의 서북면 2차 야인정벌은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이 주도하였다. 당시 정찰기병에게 휴대용의 소형 총통을 지급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야인들은 소규모 부대 단위로 평지 기마전을 수행했는데, 군사가 많으면 포위해서 사로잡고, 군사가 적으면 지형지물에 은폐하여 활을 쏘았다. 반면에, 조선군은 정찰 기병이 야인 기병의 출현을 전하면, 다섯 개 부대로 진을 쳤다. 첫 번째 신호가 울리면 각 부대에서 기병이 나와 경계에 들어가고, 다음으로 각 부대의 바깥쪽에 방패군을 배치했다. 이어서 槍長劒軍, 화통궁수군, 기창병, 기사병이 차례로 안에 벌리어 섰다. 기병은 창을 쓰는 기창병과 활을 쏘는 기사병이 있는데, 전투가 시작되면 기창병이 먼저 공격하고, 창을 든 보병이 뒤를 따랐다. 여기서 기병과 보병은 서로 협조하는 관계였다. 특히 말을 탄 궁수는 주로 측면에서 공격하였다. 임진왜란 기간 중 일본군이 사용한 조총은 그동안 야인을 상대로 연마한 평지 기마전을 일시에 무너뜨렸다. 기병에 대한 보병의 우위체제는 1575년 일본 국내의 細田信長이 조총으로 무장한 보병대가 기병대를 격파함으로써 확립되었다. 1582년, 풍신수길이 단위부대를 기병․총병․궁병․창검병으로 편성한 사실과 신립장군이 탄금대 전투에서 평지 기마전으로 진을 쳤지만, 일본군의 조총 때문에 패전한 것이 이를 반영한다. 반면에, 권율 장군이 이끈 행주산성의 공성전은 일본군이 성을 올려다보고 총을 쏘았기 때문에 피해를 받지 않았다. 조선후기의 기마전은 1627년 후금의 정묘호란, 1636년 청나라의 병자호란이 있는데, 조선은 대부분 공성전을 수행했다. 그것은 임진왜란 기간 중 조선의 주력군이 보병의 삼수병체제로 변동했기 때문이다. 정묘호란 때 서북 국경지역의 전투는 의주의 창성진 전투, 용천의 용골산성 전투, 곽산의 능한산성 전투가 있다. 당시 창성진과 용골산성에서는 공성전을 전개 해 승리한 반면, 개문 출격하여 성 밖 기마전을 수행한 능한산성 전투는 패배하였다. 병자호란 때의 전투는 국경지역의 영변 철옹성 전투와 수도 한성 근처의 남한산성 전투가 있다. 철옹성 전투는 3천의 산성 방어군이 3만의 청나라 군대를 격퇴하였고, 남한산성의 공성전도 대부분 승리하였다. 한편, 평지 기마전에서 조선군이 승리한 전투는 김화지역의 백전산 전투와 수원의 광교산 전투가 있다. 전자는 감사 홍명구가 선봉에 포수 1천 명을 배치한 결과였고, 후자는 전라병사 김준용이 창을 가진 보병으로 견고한 방진을 구축한 다음, 호준포를 발사하여 청나라 기병을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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