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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陵의 왕과 왕후 능의 위치 再考Reassessment of the Arrangement of the Royal Tombs at Changneung

Other Titles
Reassessment of the Arrangement of the Royal Tombs at Changneung
Authors
김이순
Issue Date
2010
Publisher
한국미술사학회
Keywords
왕릉(royal tomb); 석물(tomb sculpture); 창릉(Changneung); 경릉(Gyeongneung); 예종(King Yejong); 덕종(King Deokjong); 서오릉(Seooreung); 안순왕후(Queen Ansun); 소혜왕후(Queen Sohye); 창릉지(Changneungji); 문석인(Munseogin); 무석인(Museogin)
Citation
미술사학연구, v.267, no.267, pp.49 - 76
Journal Title
미술사학연구
Volume
267
Number
267
Start Page
49
End Page
76
URI
https://scholarworks.bwise.kr/hongik/handle/2020.sw.hongik/21191
DOI
10.31065/ahak.267.267.201009.002
ISSN
1225-2565
Abstract
西五陵에 위치한 昌陵은 조선 8대왕 睿宗(1450-1469)과 계비 安順王后(?-1498)의 능으로, 소위 ‘同原異岡陵’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왕릉에서 합장릉, 쌍릉,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조성될 경우에 ‘右上左下’의 원칙, 즉 ‘西上東下’ 원칙에 따라 서편에 왕의 능을, 동편에 왕후의 능을 조성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 원칙은 조선시대 내내 지켜졌고, 현재 서오릉에 위치한 德宗(1438-1457)과 昭惠王后(1437-1504)의 敬陵만이예외적으로 동쪽에 왕의 능이 위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고에서는 경릉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예종의 창릉 역시 이러한 규범을 따르지 않았음을 밝혔다. 그 근거로 석물의 조형적 특징, 문헌기록, 능 주변의지형 등을 분석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석물조각이다. 조선 왕릉 석물은 조성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능 조성자의 의지에 따라 석물의 크기, 양식, 화강암의 품질 등이 결정되기 때문에 각각의 능에 조성되어 있는 석물은 서로 다르다. 게다가 우리나라 석물은 화강암으로 조성되어 쉽게 파손되지 않는 장점이 있을 뿐 아니라,조선시대에는 무덤을 신성시하는 전통이 있어 능의 조성 및 改修를 기록해 두었기 때문에 각 능의 역사 연구에 있어 기초 史料가 될 수 있다. 창릉과 같이 임진왜란 이전에 조성된 왕릉의 경우, 기록문헌이 분명하지않은 상황에서 석물은 능 조성의 先後나 陵主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창릉의 왕과 왕후 능의 조성 시기는 29년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석물조각 양식에 차이가 발생했다. 이러한 석물 양식의 차이를 근거로 조성시기의 先後를 밝혔는데, 덕종과 소혜왕후의 경릉 석물을 그 기준으로 삼았다. 덕종과 예종은 세조의 두 아들이었으며 조성 시기도 비슷할 뿐 아니라, 경릉의 왕과 왕후 능의조성연대가 47년이나 차이나기 때문이다. 또 예종 창릉과는 불과 1-2년 시차를 두고 조성된 세조 광릉과 세종 영릉의 석인상과도 비교했다. 요컨대, 예종 창릉의 석물은 덕종 경릉, 세조 광릉, 세종 영릉의 석물과 같은 유형이어야 하며, 안순왕후 창릉과 소혜왕후 경릉의 석물이 같은 유형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무석인, 석수, 장명등, 개체석의 섬돌, 고석 등 모든 석물을 분석할 결과를 보면, 예종릉으로 알려진 서쪽에 위치한 능의 석물이 소혜왕후의 석물과 같은 유형이고 조선 왕릉 석물의 양식 흐름에서 1500년 즈음에 나타나는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서쪽에 위치한 능이 안순왕후의 능일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재 창릉의 왕과 왕후의 능 위치의 근거는 비문과 『창릉지』에 두고 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지금까지알려진 것과 달리, 능이 조성 당시의 기록이 아니라 능이 조성된 지 250년이 지난 18세기 중엽의 기록으로서 능의 위치를 규명하는 자료가 될 수 없음을 밝혔다. 그 대신 『선조실록』에서 임진왜란 직후에는 창릉의왕과 왕후의 능의 위치를 지금과는 반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이 점을 논의했던 사실을 확인하였는데, 이는 창릉의 왕과 왕후의 능의 위치가 현재 알려져 있는 것과 다를 가능성과 함께, 조선 초기에는 ‘西上東下’ 원칙의 적용에 유연성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앞으로 창릉 조성 당시의 기록문헌이 발견되거나 봉분 앞에 묻혔을 지석, 혹은 현재 위치로 옮기기 전에 원래 왕릉 앞에 건립되었던 정자각의 터나 神路의 발굴과 같은 실증적인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문제는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 이러한 실증적인 발굴 작업에 앞서, 본고에서는 석물의 양식분석에 의거한 미술사방법론으로 문헌사의 오류 여부를 검토하고, 아울러 조선 왕릉에서 석물의 미술사적 가치를 환기시키고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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