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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州 소재 高麗亭館 고찰A Study of the Gaoli(Goryeo) Lodging(高麗亭館) in Suzhou(蘇州)

Other Titles
A Study of the Gaoli(Goryeo) Lodging(高麗亭館) in Suzhou(蘇州)
Authors
박현규
Issue Date
2012
Publisher
중국사학회
Keywords
高麗; 宋; 蘇州; 明州; 密州; 高麗亭館; 閶门; 盤門; 고려; 송; 소주; 명주; 밀주; 고려정관; 창문; 반문
Citation
중국사연구, no.80, pp.71 - 97
Journal Title
중국사연구
Number
80
Start Page
71
End Page
97
URI
https://scholarworks.bwise.kr/sch/handle/2021.sw.sch/15617
ISSN
1226-4571
Abstract
본 논문에서는 고려와 송나라가 맺어온 우호 교류의 상징물인 蘇州 高麗亭館의 제반 모습을 살펴보는데 중점을 두었다. 고려정관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매우 크다. 당시 동북아시아는 동방의 고려, 중국의 송, 북방의 요가 삼각균형체제를 이르며 상호 견제 속에 활발한 외교 관계를 모색하고 있었다. 11세기 중엽에 고려와 송나라가 국교를 재개하자, 송나라는 고려를 통해 요나라를 견제하고자 고려사절을 후하게 대우해주었다. 송 신종은 고려사절이 지나가는 사행 연로의 거점 도시마다 소위 고려정관이라는 관사를 새롭게 신축하여 사신들의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중국 내륙에서 고려사절의 사행노선은 절동 명주에서 수로를 통해 수도 변경까지 이르는 南路와 산동 밀주에서 육로를 통해 수도 변경까지 이르는 東路가 있었다. 소주는 남로에 속해있는 거점 도시이다. 소주에서 고려사절이 묵은 접대 시설은 성곽 안에 懷遠亭과 安流亭이 있었고, 성문 阊门과 盤門 바깥에 각각 새로 세워진 高麗亭이 있었다. 창문과 반문 바깥에 소재한 고려정은 모두 1084년(원풍 7년)에 세워졌다. 창문 바깥 고려정은 남송 중엽까지 여전히 고려정이라는 이름을 간직하다가, 1237~1240년(嘉熙 연간)에 趙與懃에 의해 개축되고 관명을 通波亭으로 바꾸었다. 통파정은 조선 崔溥가 지나가던 1487년(성종 18)까지 남아있었으나, 그 후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훼멸되었다. 창문 바깥 고려정은 오늘날 창문 新弔橋 건너편 남쪽에 자리한 占魚墩公園 또는 인근 지역이고, 반문 바깥 고려정은 오늘날 興隆橋下塘의 동북단과 外城河가 맞닿은 강변 시민공원 자리로 추정된다. 소주 고려정관은 양국 인사들이 문화 교류를 전개했던 역사적 장소이고, 또한 양국 간의 우호 교류를 상징해주는 좋은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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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ge of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 Department of Chinese Language and Literature > 1. Journal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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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Hyun Kyu
SCH Media Labs (Deparment of Chinese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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