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지도의 암실>론

Abstract

이상문학의 시원(始原)에 해당하는 작품은 무엇일까? <12월 12일>이 작가론의 측면에서는 이상문학의 원점에 해당하는 작품이겠지만, 이후의 작품들과 이질적인 성격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작품론적 측면에서는 그것을 이상문학의 출발점으로 간주하기에 난점이 없지 않다. <지도의 암실>이 눈길을 끄는 것은 정확히 바로 이 지점에서다. <지도의 암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상문학의 발아점으로 간주되기에 손색이 없다. 우선 독자의 기대지평을 훌쩍 넘어서는 이상문학 특유의 난해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작품은 구문론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문장을 구사하고 정상적 문법을 교란하며 근원적 차원에서 기성의 문법체계에 이의를 제기한다. 또 지나친 비약을 내장한 비유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 일대일 대응관계를 허물어뜨림으로써 해석의 다의성을 낳고 있다. 나아가, 그것은 기성의 문학적 관례와 담론의 질서에 위배되는 특이하고 이질적인 서사의 구성방식을 선보이고 있기도 하다. 푸코는 한 사회의 인식과 문화를 가능케 하는 공통의 규약과 인식론적 지반이 해체된 무질서하고 혼돈스러운 공간을 헤테로토피아라 부른다. 그러니까, 헤테로토피아는 이질적인 것들이 병치되고 기괴한 상상들이 마구잡이로 펼쳐지면서 기존의 사고가 절대적으로 불가능해지는 지대이자 새로운 사고가 잉태되는 가능성의 공간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곳은 당혹스러운 정도로 모든 것이 뒤엉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구분마저 사라지지만 새로운 인식과 표상이 샘솟는 공간, 즉 문학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추어보면, <지도의 암실>이 색다른 서사적 배치와 수사를 통해 이전에는 없던 독특한 인식과 표상을 창출하는 헤테로토피아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해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