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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장으로서의 <보허사(步虛詞)>, 그 전변(轉變)에 따른 시대적 의미The Boheosa as Akjang, and its period-specific meaning according to the semantic transcription

Other Titles
The Boheosa as Akjang, and its period-specific meaning according to the semantic transcription
Authors
조규익
Issue Date
Mar-2020
Publisher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Keywords
보허자; 보허사; 오양선; 벽연롱효사; 수보록; 수명명; 선화곡; Boheoja; Boheosa; Oyangsun; Byukyeonronghyosa; Suborok; Sumyeongmyeong; Sunwhagok
Citation
한국문학과 예술, no.33, pp.269 - 321
Journal Title
한국문학과 예술
Number
33
Start Page
269
End Page
321
URI
http://scholarworks.bwise.kr/ssu/handle/2018.sw.ssu/35807
ISSN
1976-8400
Abstract
송나라에서 도입한 것으로 추정되는 도교음악 보허자(步虛子)는 고려와 조선의 궁중정재들에서 꾸준히 사용되었다. 중국에서 보허자와 그 악장 보허사는 위진남북조 시대 도교의 재초(齋醮)의식에 사용되다가 문학양식으로 전이ㆍ수용되자 많은 문인들은 ‘문학작품으로서의 보허사’ 창작에 나섰다. 도교의 민간 전파에 따라 상당 기간 도교의 환상성에 관심을 갖고 있던 문인들이 보허사로부터 종교적 색채를 빼내고 창작에 나서면서 보허사는 대량으로 창작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보허사는 단순히 문인들의 창작에 그치지 않고 궁중에 수용되어 악장의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처럼 민간과 궁중을 넘나들며 당ㆍ송대 사문학의 양식으로 창작되어 오던 각종 도가풍(道家風)의 작품들과 함께 보허사는 고려로 도입되어 고려 궁중 당악정재들의 악장으로 정착되었다. 그 중심에 서 있던 것이 보허자령(步虛子令)에 올려 부르던 <벽연롱효사(碧烟籠曉詞)>였고, 선계 이미지와 왕에 대한 송도(頌禱)는 그 핵심 내용이었다. 도교음악 및 무용과 함께 드러낸 융합예술의 완벽함은 중세왕조를 떠받쳐 줄 왕권의 강화에 결정적인 효용을 발휘했다. 고려시대 궁중무대예술에 익숙해 있던 사대부들이 바로 조선조 창업의 주축이자 이데올로그(ideologue)들이었다. 조선조가 개국되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향유하던 고려의 당악정재와 속악정재들을 보존하는 한편, 그 속에 들어있는 고려적인 것을 덜어낸 뒤 조선왕조의 새로운 정신을 담고자 했다. 초창기부터 당악이나 속악에 새로 지은 가사를 채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컨대, 수보록 정재에 보허자령으로 부르는 <보록사>를 악장으로 썼고, 수명명의 악장에 똑같이 보허자령으로 부르는 <수명명사>를 악장으로 쓴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벽연롱효사>는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오양선 정재의 악장으로 보존되고 있었으나, 자신들의 이념적 정체성을 노래하려는 수보록이나 수명명 등의 정재들에서까지 <벽연롱효사>를 쓸 수는 없었다. <벽연롱효사>를 ‘고려사악지 당악정재’ 혹은 ‘성종 조 시용당악정재’ 등에 머물러 두고, 창업주의 공덕을 찬양하고 조선왕조 영속의 당위성을 고취하기 위해 자신들이 만든 송축가들을 악장으로 삼아 보허자 조에 올려 부르는 방법을 쓴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결정적인 사례가 성종 23년의 ‘신찬등가악장’ 제2작의 <선화곡(宣化曲)>이었다. <선화곡>을 고려 당악정재 오양선의 <벽연롱효사>를 극복하고자 만든 악장으로 보는 것은 그것이 <벽연롱효사>와 거의 일치하는 형식과 규모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형태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전혀 다른 <보록사>나 <수명명사>를 기존의 당악곡 보허자령에 올려 가창하는 것이 당시의 수준이었지만, <선화곡>만은 <벽연롱효사>의 형태를 그대로 모사하여 악곡 보허자령에 채워 넣어 불렀다는 점에서 악장의 교체까지 시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 이래 보허자는 궁중 진연(進宴)의 자리에서 공연되던 당악이었으나, 조선조 중기 이후 당악이 도태되면서부터는 낙양춘과 함께 겨우 살아남아 향악화의 과정으로 접어들었다. ‘보허자령의 악장은 <벽연롱효사>이다’라는 정의에서 <벽연롱효사> 대신 <보록사>ㆍ<수명명사>로 대체되는 단계, 전사악장 <선화곡>으로 대체되는 단계 등을 거치게 되는데, 각각의 단계로 넘어갈 때 생겨나는 의미적 전변이야말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악장이나 음악 혹은 의례에 대한 당대 지식인 그룹의 현실인식과 정치상황을 반영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은 보허자 음악의 수용이라는 개별 사안을 뛰어넘는 문화ㆍ정치적 담론과 직결되는 좀 더 큰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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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 Kyu 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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