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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蒙神話>의 柳花行動을 통해본 문화변화양상에 대한 一考A study on the aspects of cultural change through Yuhwa's position in Jumong sinhwa (Jumong myth)

Authors
김종대
Issue Date
2011
Publisher
우리문학회
Keywords
柳花; 農耕神; 水神; 文化人物; 五穀種子; 보리; Yuhwa (柳花); Nongyeongsin (deity of agriculture); Susin (deity of water); Munhwainmul (cultural character); Ogokjongja (seed of the five cereals); barley
Citation
우리문학연구, no.33, pp 3 - 26
Pages
24
Journal Title
우리문학연구
Number
33
Start Page
3
End Page
26
URI
https://scholarworks.bwise.kr/cau/handle/2019.sw.cau/27903
ISSN
1229-7429
Abstract
주몽신화에 등장하는 유화에 대해서는 당대의 문화적 배경과 상관없이 농경문화로 정착된 것으로 간주하여 농경신이나 생산신, 혹은 穀母神으로 좌정하였다고 본 것이 최근까지 학계의 일반화된 견해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명왕편>과 『삼국사기』를 비교 검토하였을 경우 처음부터 유화의 성격이 농경신이었음을 찾아내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변화이유와 함께 유화가 농경신으로 정착되었던 이유는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을 본 논문의 목적으로 삼는다. 처음에 해모수를 만나고, 해모수와 이별한 이후의 유화 행동을 살펴보면 농경과는 아무런 상관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초기의 유화는 단지 水神적 속성을 갖고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유화의 신적인 성격이 변화를 드러내는 시점은 국내성에서 평양 천도의 과정, 그리고 『유기』에서 『신집』으로 재편하는 과정이 가장 유력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과거 시기 고구려의 국가기반이 온전한 농경국가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평양 천도 이후 완전한 농경국가로 정착하였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유화가 단지 주몽을 생산한 모친으로서의 기능만이 아니라, 국가의 중심기반이 농경을 관장하는 신격으로 자리잡아야 할 필요가 요구되었다. 이런 이유로서 주몽의 탈출과정에서 오곡종자를 전달하는 내용이 삽입되고, 특히 보리를 부각하려는 의도로 비둘기를 통한 전달방식이 강화된 방식을 취했다고 보았다. 이런 과정에서 새롭게 살펴야 할 것은 <주몽신화>의 원초형은 유화가 주동적으로 고구려의 문화를 담당했던 문화인물로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즉 고구려의 문화가 수렵과 유목 중심의 문화에서 농경문화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상징적인 인물로 유화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존 유화가 농경신으로 처음부터 자리잡았다고 견해 보다는 고구려의 문화전환에 따라 후대에 와서 문화상징으로 유화를 내세우는 작업이 수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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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ge of Humanities > ETC > 1. Journal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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