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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이강의 생애와 독립운동Life of Osan Lee Kang and his Independance movement

Other Titles
Life of Osan Lee Kang and his Independance movement
Authors
이기순
Issue Date
2018
Publisher
역사실학회
Keywords
Kang Lee; Jung-Gean Ahn; Ito hirobumi; United Korean Association; the Main Division of Korean National Association in Siberia; Daedong gongbo; The Korean magazine(Daehanin-Jeonggyobo);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Far eastern committee of Young Korean Academy; 오산; 이강; 안중근; 伊藤博文; 공립협회;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 대동공보; 대한인정교보; 대한민국 임시정부;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Citation
역사와 실학, no.66, pp.355 - 395
Journal Title
역사와 실학
Number
66
Start Page
355
End Page
395
URI
https://scholarworks.bwise.kr/hongik/handle/2020.sw.hongik/13113
ISSN
1976-1023
Abstract
이 논문은 하와이·북미·시베리아·만주·중국 각지를 노동자로서, 교육자로서, 종교지도자로서, 독립운동가로서 종행무진 활약하며 인간 승리의 역사를 이룬 오산 이강의 역정을 추적한 것이다. 오산은 19세기 이래 한민족 앞에 놓여진 도전에 당당히 응전하며 온갖 장애와 역경을 극복하여 한국 근대사를 새롭게 써내려 간 역사의 주인공이다. 오산은 안중근의사 사후에 재러한인사회에서 안중근정신이 독립정신의 근간이 될 수 있도록 안중근의사기념사업을 추진했다. 이후 공립협회는 대한인국민회로 발전되기까지 러시아에 공화주의를 전파한다는 혐의를 받게 되면서 러시아당국의 탄압을 받자 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는 자바이칼주 치타로 이전했다. 치타에서 러시아 정국의 현실에 적응하며 안정된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오산은 러시아정교로 개종하고 대한인정교보를 발간하며 독립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러일간에 동맹관계가 유지되면서 독립운동은 침체상태에 빠졌다. 그러다 러시아혁명의 성공으로 수립된 볼세비키 정부가 반제국주의와 해방을 부르짖자 오산은 독립운동계에 적극 등장하여 미주 대한인국민회와의 조직적 연계를 다시 시도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노농정부의 공산화 동화정책으로 민족주의 독립운동은 그 기반을 잃게 되었다. 오산은 시베리아를 떠나 上海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1926년 중반에 흥사단의 이상촌건설을 위해 廈門을 방문했다가 그것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나 오산의 강인한 신념과 정신력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자 일제의 감시를 피해 다시 망명길에 오른 오산은 상해를 떠나 鎭江으로 이동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당시 임시의정원에 복귀해 제12대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38년 이후 江西省 晉江에서 중국 학교에 교원으로 복무하며 특무활동을 통해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또한 해방이 되기까지 山西省 鉛山에 주둔한 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의 광복군 모병 활동을 전개했다. 이처럼 한 순간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던 오산은 임시정부의 남은 업무를 수행하느라 해방된 지 이듬해인 1946년 8월이 되어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해방된 고국에서 한국독립당 고문을 맡고 남산고등학교를 운영하며 흥사단운동과 평생의 동지였던 도산 안창호기념사업에 투신하다가 1964년 10월 3일,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영결식은 10월 19일 시청앞 광장에서 각계 인사들과 시민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사회장으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오산은 1902년 25세 나이에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태평양을 건너 미주로 가서 재미한인사회 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가시화되자 독립운동의 최일선에서 투쟁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미국을 떠나 강풍한설이 휘몰아치는 만주와 시베리아, 중국 벌판을 누리며 정치 정세와 체제의 변화와 종교 ·이데올로기 차이 등에서 오는 혼란 속에서도 민족 우선의 길을 선택하며 독립운동을 간단없이 이어간 불굴의 의지를 지닌 한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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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ge of Education > Department of History Education > 1. Journal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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