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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이전 조선의 황제국 용어 사용The Use of the Terms for the Empire in Korea before 1894

Other Titles
The Use of the Terms for the Empire in Korea before 1894
Authors
민회수
Issue Date
Dec-2019
Publisher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Keywords
Gunju(君主; King); Daegunju(大君主; Great King); Pyeha(陛下; His Majesty); Daegunju Pyeha(大君主陛下; His Majesty of Great King); Chik(勅; the emperor’s order); emperor(皇帝); self-reliance; 君主; 大君主; 陛下; 大君主陛下; 勅諭; 皇帝國; 反淸自主
Citation
규장각, no.55, pp.123 - 150
Journal Title
규장각
Number
55
Start Page
123
End Page
150
URI
https://scholarworks.bwise.kr/hongik/handle/2020.sw.hongik/2177
ISSN
1975-6283
Abstract
秦始皇이 처음 ‘皇帝’ 호칭을 사용하면서 동아시아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事大秩序는 皇帝國과 諸侯國 사이에 ‘황제’와 ‘國王’이라는 호칭 이외에도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朕’, ‘陛下’, ‘詔’, ‘勅’ 등의 용어를 두어, 격을 엄격하게 구별지어 놓았다. 고려시대에는 외부적으로 제후국체제를 따르면서 내부적으로 황제국 체제를 지향하는 ‘外王內帝’ 체제가 성립되기도 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내부적으로도 제후국체제의 격식을 따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근대 이전 조선의 국왕은 중국과 일본 모두에서 ‘국왕’으로 호칭되었다. 개항 이후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 국왕에 대한 호칭으로 기존에는 호칭이 아니라 일반명사로 사용되던 ‘君主’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는 영국이 1842년에 청과 체결한 南京條約에서 황제-제후 관계와 무관한 명칭을 찾으면서 발견된 것이었다. 이후 1883년 영국과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군주’ 앞에 ‘大’자가 추가되어 ‘大君主’라는 호칭이 탄생하였다. 이는 영국이 과거 중국과의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 과정에서 중국과 격을 맞추면서 만들어진 용어로 보이며, 동아시아에서는 전례가 없는 호칭이었다. 萬國公法 체제 하의 국가 간 조약은 1대 1이 원칙이므로, 영국과 격을 맞추기 위해 조선의 군주 또한 ‘대군주’로 표기되었고, 이후로 영국 이외의 여러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에서도 국왕 고종은 ‘대군주’로 지칭되어 이 명칭이 외교적으로 조선 국왕을 부르는 호칭으로 정착되었다. 한편 서구의 군주국들이 중국과 여러 조약들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사대질서하에서라면 황제국만 사용 가능한 ‘짐’, ‘조’, ‘칙’ 등의 용어들을 이들 또한 쓰게 되었고, 역시 조선과의 조약 협상 과정에서 사용되면서 조선도 격을 맞추기 위해 ‘칙’, ‘勅諭’ 등의 용어를 쓰기 시작하였다. 다만 처음에는 ‘짐’이나 ‘欽差’ 등의 표현은 사용을 삼갔는데, 갑신정변 이후 일본에 사과 사절을 보내는 과정에서 이들 역시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1888년부터 ‘대군주’ 뒤에 황제국 체제의 호칭인 ‘폐하’를 붙여 외국공관들에 보내는 외교문서에 쓰기 시작하였다, 이는 청의 내정간섭이 점증하면서 조선이 그 극복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常駐使節 파견과 더불어 외국의 인정에 기반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으로 보이며, 청에게 비밀로 하며 시행된 ‘소극적인 반청자주 정책’의 성격을 지닌다. 먼저 미국․일본 등에게 제한적으로 사용하다가 1889년부터 그 대상이 대부분의 외국 공관에로 확장된 이 ‘大君主陛下’라는 표현은 외국 공관들과의 왕복 문서에서는 일상화되었고 海關에 대해서도 쓰였으며, 마침내 1893년에는 관찬 연대기류 사료에 등장하였다. 아울러 ‘짐’이나 ‘칙유’ 등의 여타 황제국 용어 및 표현들도 외교문서를 중심으로 꾸준히 사용되어갔다. 그러던 중 1894년 이후 청․일전쟁으로 인한 국내외 정세 변동에 따라 청과의 관계 단절이 화두가 되면서 수면 아래에 있던 이 호칭이 전면으로 드러났고, 1895년부터 비단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에서도 공식적인 호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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